아이폰 상자를 연다. 제품보다 먼저 손에 닿는 건 흰 상자와 매끈한 마감이다. 로고 하나 말고는 어떤 설명도, 장식도 없다.
이 절제된 인상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본 사람은 많지 않다. 답은 스마트폰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곳에 있다. 192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작은 라디오 부품 공장.
01 애플 디자인 뒤에 있는 이름
스티브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는 여러 자리에서 한 독일 디자이너를 언급했다. 브라운의 디자인 총괄이었던 디터 람스다. 아이브는 다큐멘터리 《오브젝티파이드》에서 브라운 제품이 자신의 작업에 미친 영향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애플의 아이팟, 계산기 앱, 팟캐스트 앱 아이콘까지, 브라운 제품과 나란히 놓고 보면 우연이라 보기 어려운 지점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02 브라운은 원래 라디오 부품 회사였다
1921년 막스 브라운이 프랑크푸르트에 작은 공작소를 열면서 브라운의 역사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라디오 부품을 만들다가 점차 완제품 라디오로 사업을 넓혔고, 1930년대 말에는 독일에서 손꼽히는 라디오 제조사로 자리 잡았다.
1951년 막스 브라운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아르투어와 에르빈이 회사를 이어받았다. 전후 소비 가전 시장이 빠르게 커지던 시기, 두 형제는 울름 조형대학의 이성적인 디자인 철학에 주목했다. 그리고 1955년, 한 젊은 건축가를 채용한다.
03 목수의 손자, 회사의 얼굴이 되다
디터 람스는 1932년 비스바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목수였던 할아버지의 작업을 지켜보며 자랐고, 훗날 그 기억을 자신의 디자인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경험으로 꼽았다. 손으로 나무를 다듬는 방식, 불필요한 것을 남기지 않는 태도.
실내디자인을 공부하고 건축 사무소를 거친 람스는 1955년 브라운에 입사한다. 처음 맡은 일은 제품이 아니라 사무실 인테리어였다. 그러나 입사 첫해에 그린 스케치 한 장이 훗날 브라운 디자인 전체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1961년 람스는 디자인 총괄이 됐고, 이후 34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04 43년 먼저 있었던 아이팟
1958년 브라운은 T3 포켓 라디오를 내놓는다. 손바닥 크기, 둥근 모서리, 표면과 나란히 놓인 원형 다이얼. 지금 봐도 낯설지 않은 비례다.
1958년과 2001년, 같은 비례
T3 포켓 라디오
손바닥 크기, 원형 다이얼이 표면과 나란히 놓임
아이팟 (2001)
같은 위치, 같은 비율의 원형 컨트롤
2001년 애플이 아이팟을 공개했을 때 디자인 매체들은 곧바로 T3를 떠올렸다. 원형 컨트롤의 위치와 비율, 절제된 색감, 장식을 뺀 마감까지 두 제품을 나란히 놓으면 43년의 시차가 무색해진다.
05 계산기 하나가 아이폰 안으로 들어왔다
1987년 람스와 디트리히 루브스가 함께 디자인한 계산기 ET66도 있다. 회색 숫자 버튼, 검은 연산 버튼, 노란 등호 버튼이라는 배색 규칙을 따랐다.
초기 아이폰의 기본 계산기 앱을 열어본 적이 있다면 낯익은 조합일 것이다. 버튼의 비율과 배색이 ET66과 거의 겹친다는 지적은 디자인 업계에서 여러 차례 나왔고, 이후 애플은 버튼 모양을 조금씩 바꿔갔다.
06 적게, 그러나 더 낫게
람스는 자신의 디자인 원칙을 독일어 한 문장으로 요약한 적이 있다.
Weniger, aber besser. 적게, 그러나 더 낫게.
이 말은 장식을 없애자는 구호가 아니다. 제품에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남은 것은 최대한 정직하게 다듬는다는 태도에 가깝다. 람스가 꼽은 좋은 디자인의 조건 중에는 “최대한 디자인하지 않는 것”이라는 항목도 있다. 무언가를 더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더하지 않을지 판단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07 오래가는 디자인은 왜 유행을 안 타는가
람스가 강조한 조건 중 하나는 오래가는 디자인이었다. 유행을 따라가는 대신 몇 년이 지나도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 것. 이 조건은 브라운 제품에도, 애플 제품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1958년 T3는 지금 봐도 낡아 보이지 않고, 2007년 첫 아이폰도 마찬가지다.
다음번에 전자제품 상자를 열 때, 흰 상자와 매끈한 마감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게 될 것이다. 그 인상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100년 넘게 이어져 온 라디오 회사의 태도에서 왔다.
좋은 디자인은 소리 내지 않는다.